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통일혁명당 사건 (문단 편집) === 주요 관계자 === [[파일:통일혁명당 조직도.jpg|width=100%]] [[파일:통혁당 머그샷.jpg|width=100%]]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통일혁명당 관계자 명단 먼저 통혁당 서울시 위원장이던 김종태는 1946년 [[대구 10.1 사건]] 관련 혐의로 상당 기간 고향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둘째형인 [[김상도(1914)|김상도]]의 선거운동을 하기도 했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의원비서직에 전념했지만 1956년에는 서울대 문리대에 '청맥전선'이라는 비밀 써클을 조직하기도 했다. 한편 4월 항쟁 이후 경북노동연합회 지도고문, 경북피학살자유족회 고문, 교원노조 등에 개입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 김종태가 서울에서 자리를 잡을 무렵 전쟁 기간 다양한 형태로 잔존하던 활동가들이 전위 조직을 형성하려는 흐름이 나타났다. 물론 이런 인식 변화는 1961년 조선로동당 제4차 당대회에서 남한의 독자적인 당 건설 노선을 채택한 배경도 있었다. 이후 김종태는 남파된 김수영과 동반 [[월북]]했던 김송무와 만나 전라남도 신안군 임자도로 가 노동당 대남사업총국으로부터 청년학생과 노동조합 간부를 포섭하고 <청맥>지를 창간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게 되었는데 이것이 통혁당 서울시위원회의 시발점이 되었다. 김종태는 최영도 등을 데리고 4차례에 걸쳐 북한을 왕래하면서 김일성을 면담하고 미화 7만 달러, 한화 3,000만 원, 일화 50만 엔의 공작금을 받고 A-3지령만 167회를 수신했다. 그는 민중봉기, 간첩의 무장 집단유격투쟁을 통한 수도권 장악, 북한으로부터 무기수령을 위한 양륙거점 정찰, 특수요원 포섭, 월북 등 14개 항목의 공작임무를 갖고 있었다. 다만 김종태의 방북기는 코미디 그 자체였는데 북한에서 [[금강산]] 관광을 시켜 주었을 때는 술에 취해서 1935년에 나온 [[목포의 눈물]]을 부르다가 반동 노래 부른다고 호텔 직원들에게 신고를 당하기도 했고 북한에서 군수공업단지를 보여주었을 때는 또 남침을 준비하고 있다고 비난하질 않나 남로당 숙청에 대해서도 마구 따지기도 했으며 '[[김일성 가짜설|김일성은 가짜 아닌가?]]'라는 얘기를 해서 대남총국과 조직지도부 접대원들을 뒤집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술만 마시면 남한에서 하던 대로 허리띠를 풀고 곱사등이나 뱀장수 흉내를 내면서 질펀하게 놀았는데 북한에서는 무슨 놈의 혁명가가 저렇게 천박하냐고 몹시 당황했다고 한다. 다음으로 민족해방전선을 담당했던 김질락은 김종태의 친조카였다. 그는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하고 경남매일신문사 논설위원 등을 지내다가 김종태의 제안으로 청맥을 만들면서부터 통혁당 활동을 개시했다. 김질락은 이문규에 비해 대학 시절 써클 활동이 활발하지는 않았다고 알려졌다. 마지막으로 이문규는 대구 지역 부호 집안 출신으로, 대학 시절 서울대 문리대 이념써클인 '신진회'의 핵심인물이며 4월 항쟁 이후 학생운동을 비밀리에 지도한 지도부로 알려졌다. 그 역시 <청맥>지 활동을 시작하면서 통혁당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